한국에서 생소한 문화 1 - 토론 문화
칠 토, 논할 론. 논리로 친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문명 이래로 수천년간 줄곧 이어져 내려오는 중요한 문화가 있다. 바로 토론 문화이다. 그리스 아고라에서 시작되어 현대 영국 의회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반박하고 논리적 허점을 찾는 말의 겨루기, 논리와 수사학의 싸움이다. 민주주의의 태동,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수천년간 왕정, 공화정, 공산주의,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까지 여러 정치 형태를 겪으면서도 이어져 현대까지 내려온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이 토론 문화는 중요한 정치 자리에서는 물론이고 친구끼리의, 가족끼리의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발현된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라던지 왜 에그스크램블이 서니사이드보다 왜 맛있는지에 대해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토론에서 아주 중요한 룰이 있다. 감정이 과잉 개입되어 화를 낸다던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던지, 육체적 싸움으로 간다던지 하는 개인적 감정싸움에 말리는 사람은 게임 오버, 바로 패자이다. 이른바 토론을 할 정도의 성숙함이 없는 풋내기쯤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Chill함을 유지하면서 유머러스하게 청중을 이끌고, 상대를 단단한 논리와 여유넘치는 태도로, 말로써 압도해야 한다. 이건 말싸움이 아니다, 말 겨루기다.
민주주의의 태동인 그리스에서 생겨난 토론의 맥락을 생각하면 토론 참여자 두 명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두 명이서 엎치락 뒤치락 할 지언정 최종 지지와 판단은 청중, 그 토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청중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단순히 나혼자 이겼다고 우기는 것이 불가한데, 결국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넘어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토론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아몰랑식 어거지라던지, 개인사를 들춰내는 협잡식 공격이라던지,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벽창호식 자동응답기 같은 참가자는 절대 청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유머가 아주 중요한 스킬인데 청중을 부드럽게 이끌수 있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상대방을 여유롭게 제압할 수 있는, 큰 사람임을 은연히 보여주는 태도가 토론에서 아주 중요하다. 너무 뻣뻣하고 진지한 태도로만 일관되면 긴장되어 보이고 카리스마 없는 책상물림 샌님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발전한 학문, 수사학을 봐도 그렇다. 그래서 수사학과 토론 문화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Nothing Personal"
토론할 때 영어권 화자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Nothing personal.” “No offence.”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개인적 감정으로 ‘너’라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일로써 혹은 그 사안 자체에 집중, 객관화해서 얘기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싶은 부분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이런 토론 문화가 아주 잘 보이는 것이 영국의 국회인데 뼈있는 농담으로 부드럽게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말의 난투전 속에서도 절대 개인사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논제에 대해서만 치고박는 토론 공간이다. 일종의 샌드박스 공간으로써 그 어떤 얘기도 이 공간을 벗어나면 훌훌 털고 나갈 수 있는, 개인사적 공격이 아님을 참여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아레나이다.
서구권에서는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이런 토론 문화를 강조하고 많이 가르치는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왜 이런 의견이 중요한지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면서도 다양한 수사법과 카리스마를 통해 청충의 공감을 일으키는 교육이 필수다.
서구권의 토론 교육
서구권 나라마다 세부적 교육 방식은 조금 다른데 내가 느낀바로는 이렇다. 미국에서는 'Speak out' 내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영국에서는 일단 잘 듣고 공감을 피력하는 태도 안에서 내 의견을 예쁘게 사회적 선에 잘 포장에서 예쁜 영어식 문장으로 곱게 표현하는 수사학에 맞추고, 프랑스의 경우 뭐든지 Non, 당연하게 모든걸 받아들이지 말고 모든걸 부정하면서 내 머리, 내 생각으로 직접 생각해서 말하는 비판적 사고에 초점을 맞춘다.
서구에서는 토론문화라는게 학교에서부터, 일상에서부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려서부터 어디든 펼쳐지는 것이다 보니 오랜 사회화 과정에서 이런 토론 태도가 자연스레 녹아있다. 한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이런 토론 문화가 없었다보니 논리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다. 다 커서 한번씩 있는 토론의 공간에서는 곧잘 감정이 개입되어 씩씩거리기 십상이고, 마치 잘잘못을 따지는 것처럼 되는 등 듣는 사람도 개인적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상황이 펼쳐진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의 의견은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이견이 있더라도 표현하지 않는 유교식 문화이기에 이런 생활화된 토론 문화는 아무래도 생소하다.
생활 속 토론 문화
토론만큼 민주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민주주의가 자리잡으며 토론의 장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무래도 어설프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나만해도 대학에 가면서 토론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게 되었는데,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해본 것은 늘 으레 발표나 웅변의 형식이었지 자유로운 토론의 형태는 아니었다.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방식. 나뿐이랴,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나와 비슷한 사회화 과정을 겪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할텐데 생활속에서 토론을 별로 해본적이 없다보니 어째 낯설고 세련되지 못하다. 정치권의 '내가 누군줄 알아' 식의 감정 섞인 토론도 그렇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직장내 토론도 그렇고, 감정싸움 혹은 개인사 공격으로 점칠되는 인터넷 공간의 토론도 그렇고…
대학 가서 사귄 여러 외국인 친구와 처음 겪은 문화 충격이 바로 이 토론 문화였다. 대학시절 여러 다국적의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데, 미국, 캐나다, 남아공, 프랑스 등 다양한 서구권 친구들을 만나면서 공통적으로 겪은 것은 모두 앉아서 얘기를 하다보면 자동적으로 토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자꾸 싸움을 걸까, 시비를 걸까, 말싸움을 하고싶은걸까,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순수히 그냥 논리로 말로 주고 받는 논리 게임이라는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레 익숙해지면서 알게되었다.
한국에서 흔히 혼용되는 개념이 ‘비판’과 ‘비난’인데 비판은 건설적 차원으로 대상이 개선될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점만을 콕집어 지적하는 것이고, 비난은 문제점과 상대를 싸잡아 감정을 담아 공격하는 것이다. 토론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비판'이지만, 아무래도 모든 문제를 눈치껏 알아서 처리하고 불만이 있어도 입꾹 닫고, 말꾹 삼키고 좋은게 좋은것이라고 상하관계를 따져 대세를 따라가는 한국식 문화에서는 사실 '비판'이나 '비난'이나 일단 문제를 수면위로 올려놓으면 다 똑같이 되어버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참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은 참 뭐든 빠르게 변하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한번씩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지금이야 실내 금연이 당연해서 늘 그래왔던것 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90년대 까지만 해도 그때 버스 의자에 담배 재떨이가 달려있었다 ㅋㅋ 최근 빠르게 변하는 회식 문화도 그렇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서울 시내의 모습도 그렇고.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해가 1989년임을 생각하면 사실 충격적이다. 그 이전에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반드시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야만 가능했다. 지금이야 저비용 항공사들이 생기면서 언제든 해외로 휙휙 나갔다 오지만 사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누가 그렇게 해외여행을 다녔나. 근 10년 내에 생긴 변화를 꼽아보면 정말 많다. 그 변화가 워낙 빠르고, 또 빠르게 적응해서 늘 그래왔던것 같지만 말이다.
한국은 뭐든 빠르게 변하는 것을 생각하면 현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조금 더 토론문화가 성숙하게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10년이 몰라보게 변한 것처럼, 앞으로의 10년 또한 몰라보게 바뀌어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