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세계 2️⃣ - 차용어 (한국어 속 한자어, 영어 속 프랑스어)
때는 2016년, 일본 오사카로 가족 여행으로 갔다.
가족 중에 여행 좋아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기도 하고, 다들 여행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 내가 복닥거려 가자고 해야 가족 여행을 가게 되서 이번에도 내가 여름 가족 여행 가이드를 자진했다. 일본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적은 없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일본 드라마와 각종 매체를 달고 산지라 일본어 회화는 꽤나 자신있다(aka 서바이벌 일본어). 그 덕에 일본 여행은 항상 큰 무리 없이 다녔다만 한자를 거의 몰라서 글에 대해서는 완전 까막눈이다.
무사히 일본에 도착해서 오사카 우메다 역에서 내려 예약해둔 airBnB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워낙 출구가 많고 복잡해서 갈피를 못잡고 있던 찰나, 어쩐지 일본 처음 온 집돌이 아빠가 여기다 저기다 하면서 방향을 척척 잡아서 가는것 아닌가. 아빠가 이 길을 어떻게 알지? 싶었는데 알고보니 여기저기 표지판으로 쓰여있는 한자를 보고 바로 길을 아시는 거였다. 덕분에 길을 수월하게 찾아 무사히 예약해둔 airBnB에 입성했고 그 후 여행하는 내내 아빠의 한자 실력이 큰 도움이 됐다. 음식점 메뉴판이라던지, 관광지 안내판이라던지, 시간표 안내라던지, 각종 호텔 안내 등 보자마자 척척. 일본어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글자만큼은 현지인만큼 빠삭할 수 있다니...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가족끼리 대만여행을 가본적은 없지만 아마 아빠와 함께 번체자를 쓰는 대만 여행을 했다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리 좋은 정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것이 중국내 국수주의 관련 뉴스를 보면 참 기가 찬다. 김치나 한복이 중국의 전통이라는둥, 우리말인 한자를 왜 니들이 쓰냐는둥 별 소리 다 나오지만 사실 어디든 정신나간 사람들은 존재한다. 5천만 대한민국만 해도 별사람 다 있는데 확인된 인구만 14억인 중국은 오죽할까. 또 거대한 인트라넷 속에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외부의 정보가 많이 제한되기 때문에 자국 내 것과 비슷한 것만 보면 어? 이거 중국 것인데? 라고 그런 철없는 소리가 나오는것도, 극한의 편협한 시각과 갇힌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이 불가능하지도 않겠다 싶다. 스파게티를 봐도 '저거 사실 중국꺼, 면은 중국에서 유래했지' 라고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런식으로 따지면 진짜 원조는 아프리카다 에레기~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한자를 쓰는데에 반감이 꽤나 강한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한자는 우리말이 아닌 중국말이라고 스스로 암묵적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물론 한글이 대단한 문자이지만 가끔은 한글의 우수성을 다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한자 컴플렉스에서 어느정도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한자를 편하게 사용했고, 사실 박정희 시절 이전까지 우리 한반도 역사상 계속 한자를 사용해왔다. 한글을 주로 사용한것은 사실 그 기간이 몇십년 되지 않고, 수천년간 한자를 사용하며 한자 문화권에 완전히 동화되었기에 우리말 상당수 어휘가 한자어이다. 일본 역시 그렇고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한자는 중국의 언어라기 보다 동북아시아 통합 글자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첫 유래는 중국 고대의 한나라에서 생겨났지만, 수천년간 동북아시아 여러 사람들이 왕래하고 사용하며 지속적으로 공통적으로 발전시켜온 통합 문자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이나 일본 지역 로컬 한정으로 쓰는 새로 개발된 한자들도 존재하고, 거꾸로 중국에 영향을 줘서 건너간 어휘도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 이미 수천년간 한자와 공생해왔기에 이미 우리말의 일부가 되어버린,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종종 순우리말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해서 사용하려는 노력을 여기저기 매체에서 보는데 개인적으로 '굳이 왜?' 라는 의문점이 든다. 외래어나 비속어, 신조어를 정착시키는 차원에서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은 그 취지가 얼마든지 이해되나, 버젓이 잘 쓰이고 있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꾼다는 것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순 우리말이 한자어보다 더 우수하기 때문이란 논리인데 언어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언어가 전달되는 매체에 따라 문어체와 구어체가 다르게 쓰이듯, 화자의 상하관계에 따라 높임법이 다르게 쓰이듯, 지역같은 물리적 위치에 따라 방언이 다르듯, 언어는 여러 상황별 지역별 소통의 총체이다. 순우리말이 보편적으로 쓰이는 분야가 있는것이고, 한자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는것이다.
언어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 혼자 떠들고 나 혼자 말할거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른이와 소통하기 위함이므로 당연히 국경지대에 사는 다른 문화권, 다른 언어권 사람들과도 소통하며 섞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휘는 다른 문화권 끼리 옮겨가기도 하고 옮아오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영어이다. 영어는 유럽어 중에서도 유달리 풍부하게 발달한 어휘를 가지고 있는데(그래서 이렇게 단어 외우기가 어렵나보다…너무 많다) 그 이유는 섬나라이다 보니 온갖 다른 문화권의 이주민들이 오랜 역사동안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로마인, 앵글로 색슨, 바이킹, 아이리쉬 사람들 등등 수 많은 이주민들로 인해 온갖 언어의 잡탕이 되어 그 영향으로 단어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진 것.
당시 영국의 지배계층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영어였던 만큼 현재도 영국 왕실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필수적으로 배운다. 영어 어휘 중 무려 45%정도가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단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식당 Restaurant 부터도 불어 차용어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랑스어가 지배계층의 언어였고 당시 유럽 국제 공용어였기에 어찌보면 당연하다. 영국 내 왕족과 귀족은 당연히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했는데 당장 먹고사는 것이 문제인 평민 계층이 글을 공부하고, 철학, 문학, 학문을 할 여유가 있을리가 만무했다. 당연히 학문, 철학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고급 어휘들이 필요하기에 지배계층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고급 어휘가 발달했고 피지배계층의 언어인 영어로 일상 생활에 밀접한 단어와 숙어가 발달했다.
비슷한 논리로 우리말에서도 고급 어휘들은 전부 한자어이다. 지배 계층이 공자왈 맹자왈 논어를 읽고 학문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한자였고 더욱이 한국말과는 다른 중국어 어순을 이해해야 했으므로 사실상 글로는 외국어, 말로는 한국어를 하는 상황이었으리라. 영국의 지배 계층의 언어가 프랑스어 였다면 한국의 지배 계층의 언어는 중국어였던 것이다.
영어의 45%가 프랑스어 어휘인 상황에서 순 영어, 순 프랑스어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어 차용어므로 ‘순화’해서 이제부터 45%에 해당하는 언어를 새로 만들어 쓰자 라고 하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언어가 섞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말이 창조되기도 했을 것이므로 국적을 구분짓는것도 힘든 어휘도 있을것이다. 우리말의 경우를 보자면 한자어를 순 우리말로 ‘순화’(사실 순화라는 표현도 국민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워딩이다)해서 70%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전부 순우리말로 바꾸는것이 가능할까? 10%만 바꾸자고 해도 5천만 전 국민이 10%에 해당하는 처음보는 단어를 외국어 공부하듯 배워야 할 상황이라 가능할리도 없다.
비록 45%에 해당하는 영어 어휘가 프랑스어 차용어라고 해도 영어는 영어지 프랑스어가 아니다. 개별 단어가 차용어일뿐 그 단어를 사용하는 문장이 다르고 그 사용 방식, 상황, 격식, 문법을 모두 통칭해서 언어라고 하기에 영어는 프랑스어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굳이 순우리말이니 뭐니 주장하지도 않는다. 자문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인해, 이른바 컴플렉스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언어란 원래 소통을 위한 것이고, 고정되어있지 않기에 그 과정에서 섞이고 뒤죽박죽 덮어 씌워지며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역사처럼 켜켜이 쌓여 나아는 것이다. 이런 언어를 ‘순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특정 목적을 위해 결론을 지어놓고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