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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생각들

한국식 합리성, 영국식 합리성 - 1편

by 단호박인줄 2023. 3. 6.

2019년부터 영국에서 석사 유학을 하며 살다보니 그나라에 대한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되었다. 현지 친구들도 사귀고 현지 뉴스 매체도 접하고 현지 방식으로 살다보니 처음에는 이해 되지 않던 영국의 면모들이 하나 둘 이해가기 시작했다. 뭐든지 느리고, 어설프고, 실수 투성이, 시간 안지키고, 당일 취소에, 번거롭고, 복잡하고 등등…

 

글래스고에서는 정말 흔치 않는 쨍한 날씨...감동적이라 찍어둠 ㅋㅋ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에 살면서 참 특이하다고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한국이라면 절대 용납되지 않을 상황들이 희안하게 이곳에서는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은 생활 소품들이 현지 기준으로도 터무니 없이 비싸다던지 기차가 툭하면 지연되서 도무지 시간을 계획할 수 없다던지 예약했던 서비스가 당일날 모종의 이유로 변경 축소된다던지, 뭐 하나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투성에도 아무도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냥 조금 짜증난 정도이지만 뭐 어쩔 수 없다는 반응 🙄

 

살다보니 정말 이해가 안가는, 너무나도 바보같이 번거롭고 거의 개똥훈련을 일부러 시키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엉터리 엉망인 것들이 많다. 


Bank of Scotland 계좌 개설 썰

 

한번은 글래스고에 도착해서 학비를 내기 위해 영국 계좌를 개설하게 되었다. 당시 가게 됐던 은행은 Bank of Scotland. 악명높은 그 엉터리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놓은 블로그가 꽤 많아 단단히 각오했지만 역시 이건 각오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겪어낼 뿐 ㅋㅋㅋㅋ... 어떻게 되었냐면...

 

  1. 일단 계좌 개설을 위한 시간 예약을 잡아야한다. 한국처럼 그냥 지점으로 냅다 방문해서는 안된다.
  2. 예약을 하러 지점에 방문했다. 안내 카운터에 계좌 개설을 위한 예약을 하고 싶다고 하니, 예약 담당 직원이 이곳에 없어 여기서 직접 예약은 안되고 전화번호를 주며 이곳으로 전화해서 예약하라고 한다. (1차 뭥미)
  3. 집에 와서 전화번호로 전화를 한다. 20분이나 기다린다. 거의 영어가 아닌듯한 글래스고 사투리를 힘겹게 알아듣고 약속을 잡으려 한다고 얘기했다. 근데 약속 일정은 우편으로 보내준댄다. 그것도 내가 일정을 못고르고 그냥 특정 날로 오라고 통보한다. (2차 뭥미) 근데 이정도 얘기일거면 왜 지점에서는 못하고 굳이 전화로?
  4. 며칠 뒤 우편이 왔다 ㅋㅋ (이걸 우편으로 보내주다니 세상에…) 2주 뒤 언젠가로 되어있었다. 이 레터를 들고, 내 학교에서 발급 받은 은행 개설용 레터도 들고, 몇가지 증빙 서류를 들고 오라고 한다.
  5. 예약한 날에 은행에 도착. 한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 20분 정도 기다려서 은행원이 방으로 옴.
  6. 성공적으로 서류 작성 완료. 자필 서명으로는 모자라 내 목소리 녹음까지 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본격화 된다.

  1. 계좌를 만들었으니 한국처럼 바로 개설되고, 바로 카드를 주는줄 알았지. ㄴㄴ 그럴리가. 처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몇 주 뒤에 ‘우편’으로 체크카드와 비밀번호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신기한건 비밀번호를 내가 직접 만들수가 없고, 거기서 정해주는 랜덤 비밀번호를 무조건 써야하는데, 이걸 또 ‘우편‘으로 보내준단다. (3차 뭥미)
  2. 다음주에 드디어 우편이 왔다. 열어봤더니 계좌 활성화용 4자리 비밀번호가 들어있다. 앱에서 이 번호를 입력하고 계좌를 활성화 하란다. ㅇㅋ 그럼 해야지
  3. 앱에 들어가서 하라는대로 하고 비밀번호를 넣었다. 그런데? 6자리 비밀번호를 하나 또 요구하는게 아닌가? 내게 배송온 비밀번호는 4자리 1개인데? 이건 없는데? ㅡ,.ㅡ (4차 뭥미)
  4. 결국 앱에서 하던걸 중단하고 지점으로 다시 갔다. 그곳의 설명으로는, 4자리 비밀번호가 이번주에 도착했다면 6자리 비밀번호가 며칠 뒤에 또 하나가 올거란다. 어휴 (5차 뭥미 겸 이젠 개빡) 그런데 그 6자리를 다 받고 계정 활성화를 진행해야하는데, 지금 이미 시작해버려서 6자리 비밀번호가 올 때쯤에는 제한시간이 넘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댄다. 장난하나?
  5. 결국 비밀번호를 다시 보내준댄다. 몇 주가 더 소요
  6. 이번에도 4자리 비밀번호가 먼저 우편으로 도착했다. 며칠 더 기다리니 6자리 비밀번호가 또 왔다. 이걸 왜 한꺼번에 안보내주는가? 대체? 애초에 우편으로 보내는것도 이해가 안간다만 이걸 왜 따로따로?
  7. 이번엔 앱에서 드디어 성공적으로 계정 활성화 완료. 이제 며칠 뒤에 카드가 배송된댄다.
  8. 다음주, 드디어 카드가 배송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 체크카드가 2개 들어있다. (6차 뭥미) 이쯤되면 그냥 헛웃음이 나고 화도 안난다. 똑같은 체크카드가 두개 들어있다. 뭐가 진짜고 뭐가 실수로 들어간 카드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9. 다시 지점으로 또 갔다. 체크카드 한개가 실수로 들어온것 같다. 어떤게 진짜냐 물어보니 창구에서 카드를 슥슥 긁어보더니, 한개를 고르며 이게 활성화 되어있는 진짜 카드라고 알려준다. 알겠다 하고 은행 바깥 벽에 붙어있는 ATM으로 가서 드디어 카드를 넣었다.
  10. 근데 마그네틱 손상이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식이 안된다. (7차 뭥미)
  11. 다시 은행으로 들어가서 마그네틱 손상이라고 하니 우편으로 새로 보내주겠단다 ㅋㅋㅋㅋㅋㅋ
  12. 그 다음주에 드디어 체크카드가 왔다. 이번에는 드디어 작동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와….눈물 났다 정말. 

 

이렇게 하여 이 간단한 계좌 개설에만 무려 네달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지점 방문을 한 6-7번 했나? 통화 대기는 말할 것도 없고…그동안 쌓인 은행에서 온 헛된 우편들만 한움쿰이 됐다. 한국이었으면 당일 방문에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 안에 다 끝날 사안을 이곳에서는 이렇게 고생해서 처리해야한다. 나만 조금 더 재수가 없었지만 그냥 이런 일이 일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리 사소한 일들이라도 이런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한다. 정말 모 든 것 에...

 

이건 Monzo 라는 인터넷은행 카드였는데, 모든게 사이다 처리...바로 배송이 오고 한방에 원샷 처리가 가능했다.


영양제 직구 썰

 

한번은 아이허브에서 영양제를 시켰다. 분명히 관세 내용을 찾아봤는데, 대체 뭘 찾아봤던건지 관세 기준금액이 내가 알았던 금액보다 현격히 낮았다. 타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미국에서 들여오는 관세 기준 금액이 훨씬 낮았던 것. 그래서 해봐야 30파운드 남짓한 영양제에 세금을 때려맞았다. 그것도 배가 아픈데 더 짜증나는 점은, 이 세금을 로얄 메일 지점에서 직접 내가 납부를 하면서 물건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 집까지 배송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로얄메일 지점으로 방문해야한다.

 

근데 이 지점이 글래스고 시내 안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당히 먼 곳에 있다. 우버를 타고 가자니 택시비가 꽤 많이 나와서 고작 이 30파운드 짜리 영양제 하나 사자고 출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결심. 거의 한 7-8키로 정도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근데 막상 가보니 왠걸 너무나 급경사 언덕이다. 거의 산을 타다시피 해서 ㅠㅠ 힘겹게 도착. 줄을 서는데 무슨 내부가 교도소 같다. 벌금내듯 관세 세금을 납부하고 어렵게 내 영양제를 받아온 기억이 있다.

 


Unfortunately... 

 

영국 사람들이 정말 애용하는 단어, 말의 시작은 바로 “Unfortunately”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불행하게도‘ 인데 무언가 거절이나 사과해야할 상황, 무언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때 무조건 이 단어로 문장을 시작한다. 적절하게 사용하면 아주 좋은 표현이긴 하나 문제는, 명백히 본인이 책임의 소재가 분명한데도, 상황 탓이 아니라 본인이 잘못한 상황임에도 본인탓이 아닌 단순히 ’운‘ ’fortune’의 탓으로 돌려서 ‘Unfortunately’ 불행하게도 라고 왕왕 표현한다. 일종의 면피성 멘트이다.

 

신기한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따까리 했을 상황에서도 영국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살짝 의외라는 정도의 ’Oh☹️’반응만을 보이고 99% 확률로 괜찮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참는다. 참는다는 표현보다는 아예 화가 안올라온다고 해야할까? 그냥 그럴 수 있다, 당연히 이해한다 정도쯤을 항상 하루 일상에 전제로 깔아두고 사는 것 같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 펼쳐져도 애초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그러려니 하는 것이리라. (물론 참는것도 있다.)

 

한국은 뭐든지 신속하고 정확하다. 놀라울 정도로 디지털화가 잘 되어있어서 이 2천5백만의 인구가 사는 거대한 수도권이 이렇게나 척척 잘 돌아간다. 거의 모든 공공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고, 이런 한국의 삶에 기준을 맞춰놓고 살다가 해외 살이로 나간다면 당연히 모든게 불편할 수 밖에 없다. 한국만큼 이렇게 효율적으로 모든게 척척 돌아가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이 특별한 것이다. 한국이 특이 케이스라는 것. 

 

사실 이런 정확/효율적인 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피나는 노동력으로 제공되고 있고, 익숙해지는 만큼 사회 전체가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노동의 시간과 강도, 완벽성이 전반적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내가 서비스를 받을 때는 편하고 좋지만, 내가 서비스를 반대로 제공할 때는 힘들다. 나도 결국 노동을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이니 말이다. 쿠팡 로켓 배송을 받을 때는 좋지만, 내가 쿠팡 로켓 배송을 한다고 생각하면 더이상 그 택배의 무게를 가벼이 여길 수 없게된다. 


하루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칠 여러 일들에 대해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평균치가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지...겉으로 보는것과 실상이 다른지 참 많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다음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