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썰 & 개똥철학

언어의 세계 3️⃣ - 말과 글

by 단호박인줄 2023. 2. 16.

한국인에 거주하는 외국인 친구가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이것이다.

“한국말 쉽지? 한글 배우기 엄청 쉬워! 금방 하잖아!”

맞다, 한글은 쉽다. 그런데 한국어는 어렵다. 많은 사람이 한글과 한국어가 같은 것이라고, 동의어 쯤으로 전제하고 별 생각 없이 말한다. 한국말은 말그대로 언어이고, 한글은 한국말을 적는 글이다. 한국인은 당연히 자라나며 모국어로써 한국어를 자연스레 습득했고, 그 위에 간단명료하고 쉬운 한글만 배우면 되니 당연히 쉽지, 외국인은 한국어를 통째로 배우는 입장인데 쉬울리가 없다. 한글이야 쉽게 배우지만 한국말은 어렵게 배우는 것이다.

한글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개발자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유일무이한 글자이고, 독특한 결합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국어가 거의 한반도 안에서만 쓰이는 고립어이기 때문에 한글도 역시 한국 밖에서 쓰이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명확히 우리것, 우리의 발명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강하게 띈다.

국제적으로 볼 때 한글이 이러한 특이성을 띄는 것이지 사실 다른 거의 대부분의 글자는 개발자가 명확히 알려져있지 않고, 오랜기간 동안 여기저기 문화권에 퍼져서 사용되면서 각자 언어에 맞춰서 변형,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유럽의 알파벳이 있다. 프랑스어는 로망스어 계열이고 영어는 게르만어 계열로 가지가 갈라지지만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여 자국의 언어를 표기한다. 같은 인도-유러피안 언어로써 같은 뿌리를 공유하긴 하지만 발음이 다르므로 그 실정에 맞춰 악센트를 표현하는 새로운 글자들이 만들어져 사용된다. 아래는 흥미롭게 본 인도-유럽어의 구분을 그려놓은 가디언지의 일러스트이다.


여러 문화권이 하나의 문자 시스템을 공유하는 일은 다른곳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알파벳이 현 이태리, 크레타 섬에서 나왔다고 해서 알파벳을 쓰는 영어가 이태리어일리 없고, 프랑스어도 알파벳을 쓰니 프랑스어가 이태리어에 종속될리 없다. 말와 글은 서로 깊은 관계를 지니지만 동의어는 아니다. 글이 사용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각자의 말에 통합되고 녹아들면서 현재의 형태로 되는 것이다. 마땅히 글이 없었던 한국, 일본, 베트남은 한자를 수입하여 한자 문화권이 되었다. 한자는 뜻, 개념, 의미를 모두 담은 패키지 이다보니 글을 수입하면서 중국식 발음까지 통째로 가져왔는데 단어 차원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중국어와 우리말이 어순이 다르다보니 우리말 실정에 맞춘 이두, 향찰 문자 같은 한자 변형 글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의문자 특성상 순우리말을 그대로 적을 글이 없는건 매한가지였고 훈민정음의 첫 시작의 바로 그 유명한 ”나랏말싸미 듕긕에 달아“ 라는 구절이 바로 이래서 등장한다. 문자 시스템이 없어 중국의 문자 체계를 들여오긴 했지만, 또 오랜 시간을 지나며 한자어가 우리말에 녹아들며 그 간극이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우리말에 꼭 맞지 않는 옷을 입혀놓으니 아무래도 불편할 수 밖에. 그리하여 그 간극을 보조할 수단으로 한글이 등장했고, 일본의 경우 히라가나, 카타카나가 등장했다. (세종대왕 짱짱맨…) 한글 이전에는 순우리말을 적을 방법이 마땅히 없어 가장 가까운 소리의 한자를 음차해서 표기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네 동네 지명에 많이 남아있다.

배우기 어려운 한자로 인해 지식이 독점되고 일상 생활에 불편함이 많아 보다 수월한 글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한글이다. 사실 양반들이 글을 평민들을 착취할 수단으로써 독점했다라고 보는 접근보다는, 글을 배우고 사유하고 공부할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양반층,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되었다 라는 편이 조금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워낙 공부하는데 많은 노력이 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 긴 기간 동안 노동 없이 방에 틀어박혀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당연히 양반이지 누구였겠는가. 고급 어휘로 갈 수록 한자어가 많고, 일상에 밀접한 어휘에 순우리말이 많다. 현대 한국어도 고도의 학문, 예를 들어 법전을 찾아보면 거의 순도 100%의 한자 파티를 볼 수 있지만, 일상 생활에 밀접한 날씨, 감정, 음식에 관한 것들은 순 우리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문해력 문제점이 많이 대두된다. 실외기를 시래기라고 한다던지, 발암물질을 바람물질로, 인신공격을 임신공격이라, 사생활침해를 사생활치매, 실업계 고등학교를 시럽계라 한다던지…충격적인 맞춤법 파괴 사례는 끝도 없다. 단순히 맞춤법이 틀렸다기 보다 소리나는 대로 쓴다는 한글의 사용이 널리 되면서 그 한자의 근간 의미를 모르다보니 정말 소리나는대로 글자가 바뀌는것인데,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 같다. 마치 우리말을 영어식 표음문자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표음문자처럼 발음에 맞춰 글이 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수많은 우리말 어휘가 한자를 근간으로 하고, 한자는 표음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쓰면서 자연스레 소리따라 변해가는 영어처럼 쓰다 보면 그 어원을 점점 모르게되고, 단어 스스로 뜻을 내포하는 표의문자의 엄청난 장점을 잃게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부동산 계약만 봐도 그렇다. 부동산 vs 동산, 임대인 vs 임차인, 전세 vs 월세, 등 각각의 한자의 뜻을 알면 도무지 틀릴 수가 없는 단어들이다. 단어가 스스로를 한글자 한글자로 자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지속적으로 때문에 고대 영어를 현대 사람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의미를 적은 한자는 뜻이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수천년전 고대 자료도 지금 현대의 사람이 아무 문제 없이 읽을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조선 초기의 말을 복원해서 만든 영상을 예로 들을 수 있겠는데 단 1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완벽한 외국어 같았고, 수백년간의 세월을 지나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바뀌며 완전히 다른 소리로 변한 것 이다. 최근 젊은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한국어 맞춤법 파괴하며 사용하는 것도, 표의문자 기반인 한국어를 표음문자 처럼 쓰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것 같다. 마치 외국어 배우듯, 영어 쓰듯 모국어를 사용하는 시대다.